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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넘치는 교회
은혜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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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은혜란 무엇인가요?
1. 은혜의 정의
교회에서 가장 많이 하고 듣는 말, 그런데 많은 경우 뜻도 모르고 오해하는 겨우도 있음
성 경이 말하는 은혜는 우리가 교회 갔다 오면서 “오늘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의 은혜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참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서 ‘그레이스’라는 단어를 성경 전체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단어는 성경에 170번 나왔습니다. 그레이스만 170번 나오고 ‘그레이셔
스’(31회), ‘그레이셔스리’(4회) 등을 다 찾으면 200번 이상 나온다.
은혜라는 단어는 창세기 6장 8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때 노아라고 하는 의로운 사람을 찾으셨는데 이 장면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홍수로 말미암아 죽게 되는 가운데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장
맨 마지막 절은 요한계시록 22장 21절입니다. 여기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은혜를 언급하면서
끝납니다.
은혜는 한 마디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베푸시는 호의’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에서는 이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은 하나님의 부요함”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세상 종교와 기독교: 은혜와 행위 시스템
이 세상의 종교와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믿음의 시스템 자체가 다릅니다.
이 세상 종교의 특징: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규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서 선행을 자꾸
쌓으면 나중에 천당이든 극락이든 간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공통적으로 선행으로 악행을 보상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즉 나중에 죽어서
심판자 앞에 가면 거기에 선행과 악행을 재는 저울이 있습니다. 그때에 심판자가 저울의 양쪽 끝에
선행과 악행을 올려놓습니다. 이때에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서 저울이 선행 쪽으로 기울면 이 사람은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 시스템이 다 이것을 믿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것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구원과
영생이라는 선물을 거저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원에 관한 한 믿음으로 되는가, 행위로 되는가
의 문제에서 100% 믿음으로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행위는 사람의 구원에 일조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은혜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은혜가 무엇인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4장 1-5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육체에 관한 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
라.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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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국어를 잘해야 됩니다. 즉 성경을 읽고는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문맥을
잘 보고 문단의 대강을 잘 파악해야합니다.
2절을 보니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행위입니까, 아닙니까? 지금 저는 교리가 아니라 국어를 묻고
있습니다.
2절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다음 절은 그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겨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대목은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믿은 것은 행위입니까, 아닙니까?
칼빈주의 예정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믿는 것도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들은 믿는 것도
사람이 믿으므로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왜곡하
면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여기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
이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분명합니까?
그다음에 나오는 4, 5절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열심히 일했더니 사장님이 월말에 2백만
원의 월급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홍길동 씨는 그 월급을 보수(報酬)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사장님이
주는 은혜로 생각할까요? 물론 보수로 생각할 것입니다. 왜 보수로 여길까요? 일을 했으니까 일을
하고 무언가 거기에 상응하는 것을 받았으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보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거저 은혜로
주어집니다. 얼굴이 잘나고, 돈이 많고, 신학 공부를 많이 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죽을 때 까지
하고, 30억 원을 건축헌금으로 냈더니 하나님이 “너는 내 자녀다.”라고 하시면서 구원과 영생을
주면 그것은 보수를 받은 것입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준 것을 다시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것은 다 보수입니다. 빚 준 것을 다시 돌려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아무 일도 안했는데 거저 받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아빠가 만원을 주면서
“아들아, 정말 너 잘 커줘서 고맙다. 용돈하렴.”하면 이것은 빚일까요, 아빠가 거저 주는 선물일까요?
선물입니다.
바로 이런 선물이 은혜입니다. 아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아빠가 “너 여태까지 이렇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하고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데 누가 그 대가나 보수로 무엇을 주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니까 누가 보답으로 무엇을 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수입니다.
로마서 11장 6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칭의,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등과 같은 모든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되든지, 100% 행위로
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99%는 은혜로 되고 1%는 행위로 되는 법은 성경에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6절에 따르면
행위면 100% 행위이고 은혜면 100% 은혜이지 중간에 비스듬하게 껴서 반반씩 되거나 99% 행위
1% 은혜로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모든 선물을 100% 은혜로
준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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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4-5).
비록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 행위가 없어도 경건치 아니한 자, 하나님을 닮지 않은 자, 죄에 빠져
사는 사람과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거저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종교인들이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불교도들보다 선행을 못 하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저는 “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
다.”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의 종교 시스템은 선행을 많이 해서 나중에 선행이 악행보다 더 많아야
구원을 얻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함과 의는 그렇게 얻지 못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그렇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은 그렇게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개미와
사람이 다르듯이 하나님과 우리는 클래스가 다른 종류의 존재입니다. 개미의 일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람의 것을 가지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개미들이 사는 동네에 사람이 지은 다리가 무너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개미들이 하는 일로는 그런
다리를 치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죄라는 엄청난
규모의 다리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이 노력해도 그 죄를 치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4장 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걸레
조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갔나이다.
사람이 쌓아놓은 선행과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걸레와 같습니다. 마더 테레사든 교황이든
신부든 목사든 대통령이든 다 같습니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강아지가 밖에서 놀다가 소 갈비뼈를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사실 강아지에게는 그것이 대단히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거기 붙어 있는 살
조각 등을 보니 침이 꿀꺽 넘어갔지만 그날 강아지는 자기 주인에게 그 동안의 은혜에 선물을 해야겠다
고 작심하고는 뜯어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 갈비뼈를 물고 집에 가서 안방에 가져다놓고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지난 후 주인이 오자 강아지는 칭찬을 듣기 위해 그 갈비뼈를 물어다가 자꾸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상한 눈초리라 강아지를 바라보다가 야단을 쳤습니다. “이
더러운 것을 왜 집으로 가져 와서 난리야! 집안이 지저분해졌잖아!” 강아지에게는 그 더러운 갈비뼈가
보물이지만 주인에게는 더러움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는 주인이 이야기했습니다. “ 네 마음은 알지만
다시는 이런 것 가져오지 말렴.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내가 주는 모든
것을 마음껏 먹고 놀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자신의 것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에게는 이런 개념이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천원을 주면서 빵을 사
먹으라고 하면 대개 순진하게 “고맙습니다.”하고는 은혜로 그것을 받고 아무 소리 안하고 가서 빵을
사 먹습니다. 그런데 어른에게 돈을 주면서 무엇을 하라고 하면 “왜 돈을 주십니까? 무엇을 바라십니
까?” 등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어른이 되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에 이미
머리가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거저 준다고 하면 무슨 다른 속셈이 있느냐고 자꾸
묻습니다.
3. 은혜를 거저 얻는 이유
그러면 왜 구원을 거저 받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필수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 거저 주십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공기를 보기 바랍니다. 공기가 없이 5분이나 10분 지나면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10분 동안 숨
안 쉬고 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돈 내고 공기 사 먹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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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명과 연관된 ‘너무 귀중한 것’은 100% 거저 주어집니다. 사람이 돈 내고 사먹을 수 없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햇빛이 한 시간만 안 비치면 온 지구가 꽁꽁 얼어 모든 것이 죽습니다.
이 햇빛도 거저 받습니다. 우리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 조금이
라도 일조한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같이 너무 귀중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보통 칠팔십 년을 삽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일도 하나님이
다 거저 해 주시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을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귀중한 것을 돈이나 명예나 헌금이나 십일조로
살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런 귀중한 일에는 우리의 행위가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다 누더기 걸레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의 생명과 연관이 있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하나님이 다 거저 주십니다. 이 세상의 생명도 그렇고 앞으로 우리에게 임할
영원한 생명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도 거저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행위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삽니까?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저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청소년들과 이야기하면 풀이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죄를 짓듯이 청소년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합니다. “목사님 그것이 맞긴 맞는데요. 그런데 분명히 맞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죄를 또 지으면 제 구원이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에게 청소년 아이가 이렇게 심각하게 물으니까 그 목사님이 그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니?”
잘 깨닫기 바랍니다. 만일에 사람이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 주어졌다가
다시 회수된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에 의해서 하나님이 거저로 주었던 것을 다시 빼앗아 가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이해하시
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 구원받은 것 같고 내가 무엇을 안 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것은 우리의 감정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원토록 사는 것이 구원이므로 이런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사람이 일을 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 세상 종교 시스템의 구원이요,
마귀가 가져다주는 허구의 구원입니다.
4. 그러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아빠가 “너 너무 착하다.”고 하면서 돈을 주고는 새우깡을 사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저는 싫습니다.”하고 안 받으면 그 돈이 은혜의 선물이 될까요?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이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주겠다고 공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값없이 와서 선물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만을 위해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물을 주시면서 거저 받으라고 하는데
“저는 싫습니다.”하고 죽을 때까지 버티면 하나님의 은혜가 실질적으로 그 사람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 베풀어 놨어도 사람이 “나는 싫습니다.”하고 자유의지를 써서 그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은 그대로 두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자유의지를 꺾고 그 사람에게 강권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가져다주시는 일은 성경에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고 생각합시
출처 : 사랑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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